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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
감춰둔 감정과 다시 마주하기를 주제로 글을 이어가 보려고 합니다.
먼지 속에서 발견한 나의 언어
얼마 전, 오랜만에 집 대청소를 하던 중 우연히 장롱 깊숙이 숨겨져 있던 낡은 상자를 발견했다. 바스러질 듯 누렇게 바랜 종이와 몇 장의 사진 사이에서, 중학생 시절 쓰던 일기장이 나왔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노트, 하늘색 플라스틱 표지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내 이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걸 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내가, 그날은 왠지 모르게 천천히 그 표지를 넘기고 있었다.
첫 장을 펴는 순간, 머릿속이 울컥했다. ‘오늘은 비가 왔다. 친구랑 싸웠다. 그냥 울고 싶었다.’ 그렇게 간단하고 솔직한 문장들이, 지금의 내가 잊고 지낸 감정을 아주 또렷하게 끄집어냈다. 어른이 된 지금은 감정을 말로 꺼내는 일이 참 어렵다. 적당히 돌려 말하거나, 아무렇지 않은 척 감춰버리기 일쑤다. 그런데 그 일기 속의 나는 너무나 투명했다. ‘화가 났다’, ‘외로웠다’, ‘좋았다’—그 감정들은 숨지 않고 날 것 그대로였다.
그 일기장은 마치, 감정이라는 언어를 처음 배워가던 시기의 기록 같았다. 표현하는 데 서툴지만 진심만큼은 가득한 문장들. 읽을수록 마음이 따뜻해지면서도 아렸다. 어쩌면 우리는 나이를 먹으며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를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감정을 조심스럽게 감추는 법은 배웠지만, 그대로 드러내는 법은 잊고 사는 요즘. 그 일기 속 나의 문장들은, 지금의 나에게 잊고 있던 감정의 언어를 다시 들려주는 듯했다.
감정을 숨긴 채 살아온 나날들
누군가 내게 “요즘 어때?”라고 물으면, 자동적으로 나오는 말이 있다. “그럭저럭”, “잘 지내”, “바쁘지 뭐.” 진짜 내 마음은 전혀 담기지 않은 그런 답변들. 어느 순간부터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게 점점 어려워졌다. 실망시킬까 봐, 혹은 민망할까 봐. 때로는 내가 내 감정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감정을 ‘숨긴다’기보다, ‘모른 척한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어릴 땐 슬프면 울고, 기쁘면 소리쳤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 표현이 부담스러워진다. 어른이 되면 감정도 어른스러워야 한다는 묘한 압박감. 불편한 감정을 감추고, 웃으며 넘어가는 법은 익숙해졌지만, 그게 내 마음을 얼마나 무디게 만들었는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 한구석에 자꾸만 감정의 찌꺼기들이 쌓이고, 어느 날은 이유 없이 무기력해지고 만다.
그런 나에게 일기장은 일종의 거울이었다. 감정을 꺼내 놓는 일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오히려 나를 지키는 일이라는 걸 알려줬다. 어린 시절의 나는 감정과 싸우지 않았다. 아프면 아픈 대로 적고, 행복하면 행복한 대로 그 기분을 만끽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 시절보다 훨씬 많은 경험과 언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 하나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라도 다시 감정과 마주해보자고 다짐하게 되었다. 비록 매일 일기를 쓰지 않더라도, 하루에 한 번쯤은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지금의 나는 어떤 감정을 숨기고 있는지, 어떤 감정은 외면하고 있는지. 솔직하게 마주한다는 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다시 꺼낸 펜, 지금의 나를 적어보다
그날 이후, 나는 작은 노트를 하나 꺼내 다시 일기를 써보기로 했다. 오랜만에 펜을 들고 하얀 종이 앞에 앉으니 괜히 마음이 어색하고 낯설었다. ‘오늘 기분은 어땠지?’라는 질문 하나에도 머뭇거렸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적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문득, 예전처럼 그냥 쓰면 되는데 너무 많은 생각이 앞서는 내가 안쓰러워졌다.
그래도 조금씩 쓰기 시작하자, 마음속 무게가 한 겹씩 벗겨지는 느낌이었다. 좋은 일이 있었던 날에는 그 감정을 마음껏 적었고, 속상한 일이 있던 날에는 무심코 썼던 한 문장이 울컥하게 만들기도 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나를 다시 이해하게 만들었다. 감정은 그렇게 적어보아야 비로소 내 것이 되는 듯했다.
지금 내가 쓰는 일기는 예전처럼 꾸밈없는 글로 채워지고 있다. “오늘 하루는 조금 서운했어. 하지만 잘 참았다고 스스로를 칭찬해.” 이런 말들. 누가 보지 않으니까 오히려 더 진심을 담을 수 있다. 어느 날엔 어린 시절의 내가 등장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내 감정이 전부 흐릿해서 빈칸으로 남겨두기도 한다. 그 모든 기록이 지금의 나를 말해주고 있다.
일기장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내 감정을 다시 들여다보는 창문이 되었다. 감정을 꺼낸다는 건, 나를 소중히 여긴다는 의미다. 그렇게 감정과 다시 연결되자, 관계도 조금 달라졌다. 이전보다 조금 더 솔직해졌고, 감정을 털어놓는 일이 두렵지 않아 졌다. 장롱 속에 묻어뒀던 그 일기장이, 결국 나를 다시 나와 연결시켜 준 것이다.